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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유한양행 사장/사진=유한양행 |
소염진통제 ‘안티푸라민’, 영양제 ‘삐콤씨’, 표백제 ‘유한락스’, 폐암치료제 ‘레이저티닙’…. 유한양행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확실히 달라졌다. 의약품 유통, 생활용품을 파는 제약회사에서 신약을 수출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탈바꿈하면서 ‘제2 창업’을 일궜다.
그 선봉에 이정희 사장이 있다. 이 사장은 유한양행 공채로 입사해 최고경영자(CEO)까지 오른 내부 출신 전문 경영인이다. 유한양행에서만 40여년 재직하며 병원영업부 이사, 유통사업부·마케팅홍보담당 상무, 경영관리본부 전무·부사장, 총괄부사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런 그가 최근 신약 수출 잭팟을 터뜨리며 ‘제약계 미다스 손’으로 주목받았다. 취임 후 신약개발에 남다른 의지를 보여온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 오픈 이노베이션 고집… 폐암치료 신약 ‘잭팟’
그에게 대박을 안겨준 제품은 폐암치료제 신약 ‘레이저티닙’이다. 레이저티닙은 기존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비소세포폐암 환자를 치료하는 신약 후보물질로 폐암세포 성장에 관여하는 물질 EGFR의 돌연변이(T790M)만 골라 공격하는 표적항암제다.
이 사장은 이 신약으로 지난해 11월5일 글로벌제약사 존슨앤드존슨의 자회사인 얀센바이오테크와 총 계약규모만 12억5000만달러(한화 약 1조4000억원)에 달하는 기술수출 계약을 맺으며 세계 제약업계를 놀라게 했다.
단일 품목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의 기술수출로 이전까지는 한미약품(독일 제약사 베링거인겔하임에 폐암치료제 8500억원 규모로 기술 수출)이 갖고 있던 기록을 경신했다. 특히 이번 수출은 이 사장이 강조해온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을 통한 성과여서 의미가 남다르다.
사실 이 사장이 한국 제약사에 남을 금자탑을 세우기 시작한 것은 취임 초부터다. 그는 2015년 3월 대표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연구개발(R&D) 전략을 내놨다. 대형 제약사가 외부 기업이나 대학이 개발한 치료물질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신약후보물질을 확장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방식이다.
이 사장은 취임 첫해 바이오니아와 제넥신에 각각 1000억원, 330억원을 투자한 것을 시작으로 신약기술을 가진 바이오벤처들에 2000억원에 이르는 투자를 단행했다. 그 결과 유한양행의 신약후보물질은 2015년 초 9개에서 지난해 9월 기준 26개로 대폭 늘었다. 이번에 대박을 터뜨린 레이저티닙도 이 사장이 2015년 바이오벤처 오스코텍에서 15억원에 사들인 파이프라인이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국내 제약사들이 대부분 자체 개발 신약을 위한 R&D에 자금을 쏟은 반면 유한양행은 좋은 기술을 사들이는 방식을 택했고 결국 대박을 터뜨렸다”며 “특히 유한양행의 이번 성과는 국내 제약사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는 측면에서 특별하다”고 말했다.
그 씨앗은 이 사장의 남다른 ‘신약 사랑’에서 비롯됐다는 평이다. 이 사장은 그동안 매출이나 수익성 증대를 떠나 유한양행 하면 떠오를 대표 신약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제약업계는 이 사장의 고집스런 R&D 투자와 특유의 안목이 맞물려 유한양행이 대박신화를 일궈냈다고 평가한다.
앞으로 유한양행의 오픈 이노베이션 투자 규모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이 사장은 국내 바이오벤처뿐만 아니라 미국 현지 법인인 유한 USA, 유한 우즈베키스탄, 칭다오 세브란스병원 등 해외에도 교두보를 마련해 글로벌 시장에서의 투자 확대를 노리고 있다.
이 사장은 이런 흐름으로 “2020년 매출액 2조 클럽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업계 안팎에선 목표 달성에 이미 한발짝 다가섰다고 평한다. 실제 이 사장 취임 이래 유한양행 매출은 2015년 1조1287억원, 2016년 1조3208억원, 2017년 1조4622억원 등 연평균 13% 이상 꾸준히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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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양행 사옥/사진=유한양행 |
◆ 락스회사 이미지 업고… 신사업 진출 적극
이 사장은 신약뿐 아니라 미래 신사업 진출에도 적극적이다. 이 사장은 신규 사업을 검토하기 위해 미래전략실을 신설하고 미래먹거리 발굴에 속도를 내고 있다. 2017년에는 뷰티&헬스 전문 자회사인 ‘유한필리아’를 설립해 유아용 헬스케어 브랜드인 ‘리틀마마’를 출시했다.
지난해에는 푸드&헬스 사업부문을 발족해 새로운 건강기능식품의 기준을 제시하는 브랜드인 ‘뉴오리진’을 론칭했다. 또 임플란트 제조업체 워랜텍의 지분 35%를 인수하며 치과사업 분야로도 사업을 확장했다. 최근에는 프리미엄 분유시장과 녹용 등 건강기능식품시장 진입을 위한 준비도 마친 것으로 전해졌다.
물론 이런 행보에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는 매출 다변화도 좋지만 의약품 사업과 거리가 먼 비제약사 이미지가 강해지는 데 우려를 표하기도 한다. 과도한 도입약 비중이 수익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외국 제품을 국내에서 대신 팔아주는 ‘대행사’ 이미지나 ‘락스회사’ 이미지는 유한양행이 앞으로 고민해봐야 할 문제”라며 “다수의 제약사가 신약개발을 통한 자력 키우기에 나선 만큼 새먹거리보다 본질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바통은 다시 이 사장에게로 넘어갔다. 지난해 3월 재신임돼 오는 2021년까지 임기를 이어가는 그가 유한양행에 남기고 갈 족적은 무엇일까. 국내를 넘어 글로벌 제약시장에서 유한양행이 보여줄 행보에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