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번쯤 경험하지 않았을까? 샤워부스에 들어가 온수를 틀었는데 예상과 달리 찬물이 나온다. 급히 빨간색 표시가 된 수도꼭지를 끝까지 돌려본다. 이번에는 뜨거운 물이 쏟아진다. 화들짝 놀라 다시 파란색 수도꼭지를 돌려본다. 그런데 찬물이 나온다. 이름하여 '샤워실의 바보(a fool in the shower room)'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튼 프리드먼은 정부의 섣부른 경제정책이 경기변동폭을 오히려 크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이같은 비유를 들었다(출처 네이버). 이같은 현상은 투자에 비해 성과물은 더디고, 종종 아예 포기해 버리는 사례가 심심찮은 국내 신약개발 R&D 환경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최근들어 기술수출 7조6000억원의 한미약품 성공을 요모조모 뜯어보려는 시도가 제약산업계 안에서 활발하다고 한다. 그리해서 얻은 산업계 전반의 일반적 교훈은 '제약회사는 꾸준히 R&D를 해야 한다'는데로 모아지고 있다. 한데, 일각에선 씁쓸한 이야기도 들린다.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모 연구소장이 반성문을 썼다'거나 '우리는 왜 그렇게 못했는지 리포트를 내라'는 따위의 회사 최고 경영진의 채근 때문에 연구원들이 심한 스트레스를 느낀다는 흉흉한 소문들이다. 근래 한미약품의 성과가 충격적일만큼 대단하기는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것처럼 '찬물을 견뎌내며 따뜻한 물을 기다려 온 게 한미약품의 R&D 기조였다. 별안간 별을 딴 것은 아니었다. 상징적으로 말해 한미 R&D 기조는 '샤워실의 여우같은 곰'에 가깝다.
임성기 회장은 웬만해선 흔들리지 않는 신념과 '엔드리스(Endless) 욕심'과 디테일로 중무장한 에누리없는 실용주의자란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 회사 창립 때부터 글로벌 신약 개발을 꿈꿨다"면서도 정작 걸어온 길은 언제나 회사가 감당할 수 있는 일부터 불도저처럼 먼저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의 싸움처럼 성을 하나 점령하고 나면 속도를 내 다음 성으로 진군하는 방식이다. '신약개발'이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으면 산업계와 연구계가 시시한 것으로 치부할 때 그 이름도 낯설고 촌스러운 '개량신약'이란 용어를 들고 나온 것도 임 회장이었다. 대한민국 제약산업의 수준과 글로벌 신약개발 능력간 엄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던 것이며, 그 간극을 효과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도구를 개량으로 보았던 것이다.
고혈압치료제 아모디핀은 개량신약의 상징이다. 개량신약으로 재미를 본 후 남들이 이 개량신약에 주목할 때 복합신약으로 뛰었고, 복합신약에 사람들이 몰릴 때 신약기술 수출로 퀀텀점프를 했다. 개량신약에 관한 그의 믿음은 1997년 노바티스를 상대로 한 기술수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사이클로스포린 제제의 효율성을 개선시킨 마이크로 에멀전 기술수출로 약 1억불을 벌어들이면서 '개량신약을 통한 단계적 접근'이 머지않아 자신과 한미약품을 글로벌 시장으로 데려다 줄것으로 확신한 것같다. 당연히 성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모디핀, 슬리머 등 염변경 개량신약에서 성공을 맛본 경험은 항혈전제 플라빅스 개량신약에서 쓴맛을 본다. 야심찼던 개량신약 접근방법은 미흡했던 특허 예측 탓에 제네릭으로 직진했던 국내 제약사들에게 참패를 당했다. 넥시움 개량신약 에소메졸도 미국에서 빅파마 아스트라제네카를 상대로 특허도전까지하며 허가를 받았지만, 정작 손에 쥔 것은 현금대신 도전과 경험이라는 자산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미약품은 글로벌 도전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시행착오를 거쳤다.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CRO와 계약했으나 자체 실력 부족으로 이를 적절하게 관리하지 못했다. 복기를 해 보니 휘둘렸다. 문제가 드러나자 즉시 임상조직을 보강했다. 글로벌 임상시험을 위해 필요한 임상시험용 의약품생산도 이름깨나 있다는 CMO에게 의뢰해 해결하려 했으나 시일이 늦춰지는 등 현실적 문제에 직면했다. '늦었다고 판단할 때가 제일 빠른 시점'이라는 말처럼 한미는 다시 임상시험용 의약품만 생산하는 전용공장을 지었다. 한미는 마치 고구려군처럼 행동했다.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대륙으로 나가겠다며 도착한 강엔 살얼음조차 얼지 않았다. 고구려군은 포기하는 대신 인근 나무를 베어 부교를 만들었다. CTO같은 CEO 이관순 사장의 말처럼 한미는 '적당히 빨리빨리'로 시작해 '철저히 빨리빨리'로 변신해왔다.
임성기 회장이 '뚝심'으로 상징되는 것은 이처럼 난관에 부딪혔을 때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관성이라는 R&D 문화의 시발점이 임 회장이라고 한미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병역특례자로 왔다가, 임 회장의 설득에 연구원, 연구소장, CEO로 31년째 근무하는 이관순 사장이 이를 보여준다. 통상 다른 제약회사 같았으면, 이 사장은 그동안 크고 작은 성취에도 불구하고 여러 돌출된 문제의 책임을 지고 짐을 싸도 여러번 쌌을 것이다. 초창기부터 임 회장을 지켜봐왔던 정지석 전 부회장은 "임 회장은 적당히 하려다 실패하면 용서 않지만, 잘 해보려다 실패한 때는 절대로 힐책하지 않는다"고 한미약품 30년사에서 밝혔다. 이관순 사장도 최근 KPAC 발표 때 "한창 의욕적으로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예측못한 경쟁물질이나 기술 때문에 드롭한 적이 있지만 이로인해 연구자가 문책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R&D에 관한한 31년째 동지인 임 회장과 이 사장의 대화는 늘 연속선상에 있다. 정례 회의에 불려가 결과를 보고하고, 가끔 칭찬을 받고 종종 호통을 당하는 일반적인 제약계 문화와 다르다.
임성기 회장은 R&D 디테일을 풍부하게 갖춘 바윗덩어리같은 부동심의 소유자로 평가 받는다. 제약산업의 R&D 특성과 본질을 꿰뜷고 있었기 때문에 2005년부터 올해 3분기까지 11년간 9333억원의 R&D 비용을 줄기차게 투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기간중엔 영업이익이 바닥을 친때도 있었다. '저러다 회사 망한다'고 공개석상에서 한미를 걱정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도 30명의 연구원이 기반기술 랩스커버리(롱액팅 기술) 기술 개발과 확립에 13년을 전념할 수 있었다. 한미의 특성이다. 만약, 이 기간 중에 임 회장이 "대체 13년동안 돈만 쓰고 뭔 일을 한거요"라고 의문을 품고 질책만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대규모 기술수출의 뿌리는 이미 뽑혀 버렸을 것이다. 연구원들도 '이 산이 아닌가보네' 하며 임 회장을 안심시킬 그럴싸한 보고서를 또 만들었을 테고, 냉탕과 온탕을 오고 가는 시발점이 되었을 것이다. 회사 경영진이 R&D에 굳건한 지지를 보내지 않는 한 연구원들이 평상심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줄기찬 투자가 가능했던 건 막연한 고집 때문이 아니라 임성기 회장이 디테일에 강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신약개발 연구의 특성이 무엇인지, 연구가 어디까지 진척이 됐는지, 임상결과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구원이 왜 그렇게 결정할 수 밖에 없었는지, 세계 연구개발 동향은 어디로 흐르는지 같은 디테일에 밝았기 때문에 그의 신념도 유지됐을 것이다. 연구 인력 육성 방식만 해도 그렇다. 학사나 석사학위로 입사한 연구원들은 대개 회삿 돈으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이관순 사장과 권세창 연구소장이 1, 2호다. 지금도 30여명의 박사과정 연구원이 이렇게 공부하며 프로젝트를 진척시키고 있다. 회사 연구 프로젝트를 가지고 연구원들이 공부하며 실력을 닦고, 이런 기반에서 롱텀 파트너십이 나온다는 생리를 임 회장은 알고 있었던 셈이다. 바둑대회를 위해 프로기사에게 기초부터 배우고, 1년 후 필드에 나갈 계획을 세운 후 거의 매일 새벽 500개씩 연습공을 치는 주도 면밀함이 R&D 한미의 초석이었던 셈이다.
한미약품의 최근 성취가 제약산업계에 주는 메시지는 간결하다. 제약사들이 애초에 회사의 특성에 맞춰 고민끝에 결정한 방향대로 꾸준히 밀고 나가면서 시행착오에 좌절하지 않고 문제를 극복해 내다보면 설정한 목표점에 이르게 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장착이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도 5000~1만개 물질중에서 겨우 2~3개가 상업적으로 성공할까 말까하는 게임이 신약개발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왜 한미처럼 못했느냐고 채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성찰이 필요하다면 우선순위는 연구원이 아니라 최고경영진부터 일 것이다. 지금 산업계에는 어느때보다 뿌려놓은 씨앗이 많다. 고령의 회장이 고혈압치료제 카나브를 들고 남미를 누비는 보령제약이나, 글로칼리제이션을 주창하며 글로벌 시장개척에 박차를 가하는 대웅제약이나, 자기 색채가 뚜렷한 녹십자나 보유 강점을 극대화하려는 모든 제약사들이 다 승자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대적 과제인 R&D를 꾸준히 하고, 윤리경영을 하다보면 5년, 10년 뒤엔 각자 소기했던 목표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반성문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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