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호 한국제약협회 회장
이경호 한국제약협회 회장

한국 제약·바이오산업이 이 가을의 때 이른 추위처럼 시린 성장통을 앓고 있다.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의 연구개발(R&D) 역량에 대한 시비와 함께 주식시장에서 업종 전체의 무더기 주가 하락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아무래도 한미약품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때 제약산업의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 특성, 신약 개발의 험난한 여정에 대한 이해 부족이 과도한 오해를 초래하고 있다는 생각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12년, 그리고 0.02%.' 후보 물질 발굴부터 하나의 신약이 탄생하기까지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과 신약 개발이 성공할 확률이다.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에 걸쳐 최소 5000개 정도의 후보 물질 가운데 단 하나의 신약만이 극한의 가능성을 비집고 빛을 본다. 금광 개발 성공 확률(10%), 유전 개발 성공 확률(5%)도 신약 개발보다는 각각 500배, 250배나 높다.

비용은 또 어떤가? 글로벌 연구개발 투자 규모 1위를 자랑하는 스위스 제약기업 로슈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하나의 신약 탄생에 평균 1조1667억원의 비용이 투입돼야 한다. 신약이 허가를 받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할 임상시험 과정에서 약효가 당초 예상보다 낮거나 뜻하지 않은 부작용과 사망 사고 등이 발생해 중단되기도 한다. 다른 제약사가 개발 중인 경쟁 약물의 효능이 아주 좋고 개발 속도가 너무 빨라 자사 신약의 개발을 포기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래서 신약 개발 경쟁은 시간 싸움이자 머니게임이다. 제약사들은 1400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의약품 시장에서 약 하나로 연간 10조원 이상 벌어들이는 블록버스터 신약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총매출액이 겨우 1조원을 넘는 회사들이 업계 수위를 다툴 정도로 규모가 작은 우리나라 제약사들로선 이처럼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신약 개발의 리스크를 줄이려 한다. 다국적 제약회사에 기술을 수출하거나 공동 개발 계약을 맺는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최근 한국 경제가 나라 안팎의 어려움으로 저성장 국면에 돌입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약·바이오산업은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국가 기간산업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글로벌 시장 진출을 통한 미래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반 제조산업도 다르지 않겠지만, 신약 개발에 따르는 숱한 리스크는 제약산업이 업의 가치에 대한 투철한 기업가정신 없이는 버티기 힘든 산업이라는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제약기업들의 신약 개발 역량 혹은 의지에 대한 평가절하나 불신이 확대되거나 정부의 육성 지원 기조가 만에 하나 후퇴한다면 국가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자 희망의 씨앗을 스스로 짓밟는 결과가 될 것이다.

신약 개발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은 물 론 관련 산업의 연구 개발 동력으로 선순환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 먹거리로서 국가 존립의 튼튼한 기반이 될 것이다.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이 신약 개발이라는 대장정에 나서 여러 번 넘어지고 좌절해도 또다시 털고 일어나야 하는 이유다. 제약기업들이 숱한 실패와 도전 속에 성공의 불씨를 키워가는 고난의 여정을 포기하지 않도록 국민의 신뢰와 성원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