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산위기에 선 국내 제약사
조선일보 [논단] 2000-09-08 06면

현재 약사법 개정안은 의약분업 시행에 따라 600종 내외의 ‘상용처방약’을 정하도록 규정했다. 이는 약국의 약품 구비와 관리 등 행정 편의 만을 고려한 발상으로 국내의 의학과 약학, 제약산업, 나아가 국가 경제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상용처방약의 제한 규정은 결국 우리의 제약업계를 도산시켜, 선진국의 ‘의약품 식민지’로 전락시킬 우려가 높다. 현재 국내에서 유통되는 정신과 약물을 포함한 '중추신경계 약물’은 모두 외국에서 개발된 것이다.

‘신약’을 개발한 외국 제약회사는 특허 기간 ‘오리지널 제품’으로 보호받아 고가로 독점 판매, 많은 수익을 올리게 된다. 국내 제약회사에서는 이 기간이 지나야 ‘카피(copy)’제품(이하 구약·구약)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이 구약보다 효과면에서 모두 우수한 것은 아니고, 구약에 없던 심각한 부작용마저 생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구약은 특허 기간이 지났다고 약효까지 갑자기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구약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국내의 구약 생산에 대한 수익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 반면, 외국 기업의 신약은 고가를 그대로 인정해 주고 있다. 이에 따라 구약은 일정 기간 생산하다 발을 빼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 국내 제약업계의 상식처럼 되어버렸다.

이 같은 국내상황에서 상용처방약 목록을 제한하면 당연히 오리지널 신약으로만 채워져, 외국 제약회사가 국내 의사의 처방을 좌지우지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한 예로, 구약으로 잘 치료되던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구약을 생산하던 국내회사가 정부의 낮은 약값 인정으로 타산이 맞지 않자 생산을 중단했다. 결국 이 환자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고가의 신약을 처방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의사는 싸면서도 좋은 약을 잃고, 환자는 잘 맞는 약 대신 효과가 불확실한 약을 써야 한다.

신약개발이 초보 단계인 우리 실정에선 국내서 생산하는 구약을 보호해야만 한다.
국내 제약회사를 키워야 이들이 수익의 일부를 연구개발에 재투자, 우리도 신약개발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겠지만, 그전에 국내 제약회사는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우리나라 같이 자원이 빈약한 국가는 고급두뇌를 이용한 고부가가치 산업을 우선적으로 양성해야 한다. 제약업, 특히 중추신경계약물의 개발이 바로 여기에 해당하며, 전 세계적으로 유수한 제약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드는 유망 분야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 같은 국내 신약개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현재 국내 의약품 관리정책은 그렇지 못한 모순을 보이고 있다.

‘상용처방약’ 규정은 당연히 철회되어야 한다. 국가나 국민, 의학, 약학, 제약업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는 잘못된 정책이다. 국내 민영기업에서 수익성이 적어 한시적 생산만 하는 구약에 대한 보호·관리의 중요성을 정부가 이제라도 심각하게 인식, 이 문제 해결에 주도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구약 생산 기업에 특전을 주든가, 아니면 국·공영기업을 만들어 구약을 살려야 한다. 이런 것이 나라의 살림을 대신 맡고 있는 국가 본연의 할 일이다.

지금 우리는 의권·약권 수호로 갈려 첨예한 소모전을 벌일 때가 아니다. 앞으로 해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외화가 외국기업으로 넘어갈 것이다. 신약을 개발할 능력이 있는 외국 제약업계는 한국 정부의 현 정책을 내심 적극 환영하고 있을 것이다.

/ 윤도준 경희대의대 신경정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