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약분업과 新의료식민지
문화일보 [기고] 2000/08/18

의·약분업을 둘러싼 의사들의 폐업, 정책만 수립해 놓고 시행준비를 제대로 못한 정부, 필요한 약품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제약사들을 연일 언론과 시민단체가 질타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다국적 제약사의 국내시장 잠식이 국내 군소 제약업계의 심각한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의·약분업 실시 이후 다국적 제약사의 처방건수가 급증하고 있다. 분업 시행에 때를 맞춰 다국적 의약품 유통업체인 쥴릭파마코리아가 국내 의약품 유통시장에 뛰어들었다. 쥴릭 유통망에 참여한 다국적 제약사는 30여개에 달하며 국내 제약사도 서너곳 포함되어 있다.

쥴릭은 특정 도매상과 컨소시엄을 형성하고 의약품을 배타적으로 독점 공급하고 있다. 지금은 국내 의약품의 5%를 공급하지만 금년내로 15%까지 늘려나갈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다국적 유통업체 시장 잠식

실례로 한 다국적 제약사는 의·약분업과 함께 매출이 수개월만에 300%나 증가했다. 이는 우리 제약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다국적 제약사들에 의한 급속한 시장 잠식과 분업이 가져올 신의료 식민화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뻐꾸기는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낳고 그 둥지의 어미새는 그것도 모른 채 정성스럽게 키운다. 어느 정도 성장하면 엄마 뻐꾸기가 찾아와 데리고 간다.

뻐꾸기의 탁란(托卵)처럼 그동안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제약사는 대조(original)약품을 팔면서 때를 기다렸다. 국내 제약업계는 신약개발보다는 대조약을 기술도입 또는 위탁판매해 주거나 복제(copy)의약품만 생산하면서 안주해 왔다. 알이 성장해 오히려 자신의 먹이를 가져가는 새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지만 때늦은 후회일 뿐이다.

그동안 의·약분업이 시행되면 국내 메이저급 제약사가 상당한 이득을 볼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뚜껑을 열어보면 영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다국적 제약사에 이익만 줄 뿐이다.

그 이유는 우선 분업 이후 무방비 상태로 열린 국내시장에 다국적 제약사들이 공동전선을 구축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국내 의약품 유통체계의 후진성과 국내 제약사의 제품경쟁력 약화로 다국적 제약사들이 우리 의약품 유통시장을 급속하게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근본적인 대책들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의·약분업은 소탐대실이 될 수도 있다.

한국형 신약개발 적극 투자를

국민에게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여 의약품 오·남용을 막을 수 있고 난립된 제약사들이 시장경쟁 속에 정리되어 탄탄한 구조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이득보다는 다국적 제약사에 의한 급속한 시장 잠식으로 국내 제약업계의 토대가 무너져 신의료 식민화를 초래하는 것이 더 큰 손실이 아닐까.

이같은 다국적 제약사의 시장 잠식을 막기 위해서는 의사와 약사 모두 적절한 진료와 조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같은 효능의 의약품이라면 국산 의약품을 처방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국내 메이저 제약사들은 우선 급한 의약품의 원활한 공급에 전력을 다해야 하고 나아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한국형 신약 개발을 위한 연구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국민도 분업의 실천 주체라는 사명감으로 적극 협조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렇게 해야 다국적 제약사가 우리 의약품 시장에 걸어놓은 의약품 공급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의·약분업이 의료선진화를 앞당기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약분업의 본질을 축소시켜 다국적 제약사와의 종속관계를 고착시킬 것인지, 아니면 국민건강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자생력있는 약업계로 거듭날 수 있는 타산지석의 시금석으로 삼을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 박용한 한국의료정보사업진흥협회장